드래곤의 반려(Heart Of Dragon)(전2권)
이수림(수룡) / 로맨스 / 로맨스 판타지
★★★★★ 10.0
1. 특별 보너스로 회귀하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헬란 제국의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 오이난국이었다. 1년 내내 날씨가 온화하고, 작물들이 많이 자라 먹을 것이 풍족해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고 일컫는 축복받은 땅이었다. 나라 어디를 가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넓은 평야와 우기 때 내리는 풍족한 물, 1년에 삼모작이 가능한 황토를 가진 나라이기에, 오이난국의 백성들은 자기 땅을 가지고 있으면 그 땅을 가꾸고 살아도 한 일가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오이난국은 먹을 것과 자원을 많이 가진 나라였지만 군사력이나 다른 정치적인 면에서는 주변국보다 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그래서 적당히 조공을 바쳐 강대국을 등에 업고 왕조와 나라를 유지했다. 지금은 헬란 제국 신하의 나라가 되어 헬란 제국의 비호 아래 타국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그녀는 오이난국과 헬란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헬란 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고, 친어머니가 헬란 제국 사람이었기에 헬란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된 그녀는 국경 지대를 지배하던 아슬로가 남작의 딸을 모시게 되었다. 오이난국은 대대로 농사를 짓는 나라였기에 농사 아닌 다른 일은 잘 하지 않았다. 특히 귀족들은 평민을 멸시했기에 귀족을 상대하는 일은 더욱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천애 고아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의탁할 곳이 없었고 집안에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일을 찾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는 남자들이 존재했기에 그들을 피하기 위해 여자들이 많이 일하는 귀족가의 하녀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슬로가의 딸은 조용한 귀족 아가씨였다. 하지만 손버릇이 나빠 가끔 시녀들을 때렸고, 그녀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반 평민과 다르게 아름다웠다. 굽이치는 백금발 머리카락과 호반(湖畔)을 닮은 파란 눈동자, 눈처럼 하얀 피부. 오이난국 사람들은 원래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거칠지만, 그녀는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오이난국 사람들은 하얀 피부를 선호했기에 그녀의 피부와 외모는 다른 이들의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영애는 그녀를 곱게 대하지 않았다.
아슬로 영애의 핍박을 받으며 귀족가에 살던 그녀는 어느 날 친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미혼모였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존재를 끝까지 알려 주지 않고 돌아가셨기에 그녀는 친아버지가 살아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헬란의 귀족이었다. 보이타 남작가의 가주로, 젊은 시절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그가 친아버지인 것을 믿었다. 그의 눈동자와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머리카락과 그녀의 머리카락이 똑같은 색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만나 기뻤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을 찾아왔다고 말한 아버지의 가면은 헬란 제국으로 가자마자 벗겨졌다. 보이타 남작은 그녀를 헬란 제국의 대공비로 만들 생각으로 찾은 것이었다. 그녀의 용도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런 태도에 섭섭함을 느꼈으나, 귀족가의 시녀로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에 아버지의 말대로 대공비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인 대공은 굉장히 잘생긴 남자였다. 이름은 뮤이지니안 블로딘 헬란. 그는 결혼하고 나서 그녀를 살갑게 맞이하지 않았고, 첩들과 놀아나면서 대공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 석상에는 그녀를 꼬박꼬박 데려가는 등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연기하던 남자였다.
대공비가 되었으나 그녀는 이 자리가 기쁘지 않았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자리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살갑게 지낼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대공비로 일을 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뮤이지니안의 어머니였던 황후는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며 잘해 주었다. 거기에 위안을 삼으며 그녀는 조용히 대공비로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뮤이지니안이 술을 거하게 마시고 취한 채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손에 검을 들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은 당신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검으로 그녀를 베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그녀의 목을 스쳤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남편의 칼날 아래 그녀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
*
인생은 짧다. 노인이 되면 이렇게 말한다. 젊은 나이에 죽은 자신의 인생은 그럼 얼마나 짧은 것일까.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만이 지배하는 공간, 이곳에 낡은 탁자와 소파의 존재는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소파에 앉아 자신의 삶을 생각하던 그녀에게 한 남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걸어오는 것도 아니었고 날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고요히 서 있는데 그의 존재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니, 그는 가만히 있고 그녀의 존재가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생각은 다 하셨나요?”
소름이 끼치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미남자가 말을 했다. 이 어두운 공간을 지배하는 죽음의 신, 유신의 말에 그녀는 잠시 여전히 고민을 끝내지 못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죠?”
마지막에 죽은 것을 제외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었다. 그래서 결정하기 힘든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333······ 33번째에 죽었다. 저승인 샤함에서 가장 귀한 숫자인 ‘3’이 무더기로 달려 있기에 그녀는 특별 보너스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원하는 소원을 빌게 되었다. 유신은 무엇이든지 들어준다고 했다. 살아생전 좋은 일이 별로 없던 그녀였기에 처음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소원이라······.
부자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할까.
대공비로 살면서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부자가 되어도 특별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이나 돈이 많은 것이나 똑같은 일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죽기 전 남편의 얼굴이었다.
그냥 존재감 없이 살았을 뿐인데. 이름뿐인 아내라 해도 살을 섞으며 같이 살았는데 꼭 자신을 죽여야 했을까.
“하아.”
마음이 답답했다.
왜 자신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죽이기 위해 아내로 삼은 걸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시간을 돌리는 것도 할 수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네.”
남편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그의 손에 죽을 때 마음이 아주 아팠던 것 같았다.
“그렇게 죽어서 억울해요.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이런 서글픔은 없을 텐데.”
그녀의 소원은 간단한 것이었지만 어려운 소원이었다.
“알겠습니다.”
유신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고운 가는 손가락이 그녀를 향해 유혹하는 것 같았다. 어서 손을 잡으라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잡았다.
어둡던 공간에 빛이 생겼다. 환한 빛줄기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눈부심에 눈을 감은 그녀의 귓가에 유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한 번 살아 보세요.”
죽음의 신은 지금 상황이 재미있는 것 같았다. 반짝거리는 장난감을 본 아이처럼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당신이 이유를 알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줄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
*
소담한 과일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우기의 절정, 어제 막 밭에서 딴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 걷는 소녀의 발걸음은 조용하기만 했다. 소녀는 무더운 여름에 팔다리를 모두 다 가린 옷 ― 추운 지방에서 입을 만한 옷 ― 을 입고 있었고, 땀에 젖은 몸에서는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듯 냄새가 났다. 머리에는 기름기가 줄줄 흘렀다. 그래서 소녀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저절로 소녀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오이난국은 우기 때 습한 기온 때문에 목욕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다. 건기라 해도 목욕을 안 하는 일은 없었다. 예로부터 청결을 중시하는 풍습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깨끗한 나라였고, 습한 기온인데도 전염병이 드문 나라였다.
그래서 소녀처럼 씻지 않은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과일을 든 그녀가 몸이 남자의 몸에 부딪혔다. 과일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재수 없게!”
“죄송합니다.”
남자는 몸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줍는 소녀를 보고 침을 퉤 뱉고 거리를 걸었다.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우.’
지저분한 백금발이 자꾸 시야를 방해했다. 앞머리를 자르지 않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데굴데굴 굴러간 과일은 오늘 내일 먹을 식량이었다. 자신을 고용하지 않으려는 사장에게 사정해서 겨우 일할 수 있었고, 그 수당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안 되겠다.’
자신의 본 모습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지만, 소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앞머리를 손으로 잡고 올렸다. 머리카락 아래 감춰 왔던 아름다운 벽안이 반짝거렸다.
과일 하나가 저 멀리까지 굴러가 있었다. 과일의 위치를 확인한 그녀는 과일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고 마지막 하나 남은 과일을 줍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과일을 들고 그녀에게 걸어왔다. 뜨거운 햇살 아래 이곳과 어울리지 않은 검은 색 로브로 온몸을 가린 사람이었다.
“여기.”
아직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로브 속에 얼굴을 감춘 소년은 손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녀는 그 과일을 한참 바라보다 얼른 과일을 잡고 바구니에 담으며 소년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
소년은 한참동안 소녀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 소녀를 응시하던 소년은 곧 몸을 돌렸다. 로브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자신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
길고 긴 꿈을 꿔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밤, 잠에서 깨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은 에다일 뿐인 것을 알았다. 대공비가 아니고,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 여인도 아니었다. 열네 살의 한창 아름다운 것에 관심을 가질, 어린 소녀였다. 그래서 개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아버지가 헬란 제국의 귀족인 것이냐고. 그래서 내가 이곳 사람들하고 달리 피부가 흰 것이냐고. 왜냐하면 어머니는 헬란 제국 사람이지만 피부색이 자신처럼 하얗지 않았다. 어머니의 까만 피부는 오히려 오이난국 사람과 닮았다. 그러니 자신의 피부는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이상한 꿈을 꿔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했기에 이전부터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금방 부정할 줄 알았던 어머니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수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나무로 만든 식탁에 음식을 그냥 두고 침묵만 고수하던 어머니. 에다는 그런 어머니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에다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을 때,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니.”
“진짜예요?”
“그래.”
어머니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문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 아버지가 보이타 남작인 건 아니죠?”
에다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
어머니가 손을 바르르 떨며 물을 찾았다. 황토로 뒤덮인 이곳에서 물은 항상 정화해서 마셔야 했기에 생수가 귀했다. 항상 아껴 먹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닦으며 에다에게 조용히 물었다.
“누가 말해 주었니.”
“그냥 알았어요.”
“어떻게.”
“꿈을 꿨어요.”
“꿈?”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요.”
죽어서 알게 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에다는 사실의 일부분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에다에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개 같은 놈이었어.”
“엄마.”
“그래서 도망쳤다.”
헬란 제국을 벗어나 타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났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에다는 책상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 정말 회귀한 거야.’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다 얼른 책상으로 가 의자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꼼꼼히 적은 그녀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1. 외모 감추기.
2. 돈 모으기.
3. 아버지 피하기.>
뮤이지니안의 아내가 되면 또다시 존재감 없이 무시당하던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녀는 세 번째 목록에 별표를 쳤다.
그때였다. 그녀가 들고 있던 펜이 저절로 움직이며 종이에 글을 썼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이곳을 채웠다.
<회귀를 축하해요. 우선 거기에서 미래를 대비하세요. 총명한 당신이라면 분명히 잘할 겁니다.>
그녀의 종이에 쓰인 글씨가 동글동글하고 예뻤다.
“야, 진짜야! 진짜였어!”
유신이 쓴 걸까?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죽음의 신 말고는 없었다.
그녀는 종이에 쓰인 대로 미래를 준비하기로 했다.
우선 가장 쉬운 것부터, 그녀는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살짝 웃었다.
당분간 이 예쁜 얼굴하고는 안녕이다.
*
*
오이난국의 우기에는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오늘도 맑은 하늘에 갑자기 번개가 치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익숙하게 우비를 꺼내거나 우산을 썼다. 로브로 전신을 가린 소년 역시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쳐 썼다. 쇠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년의 로브 위로 떨어지던 물줄기가 우산 위로 떨어졌다. 후드득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땅을 때리는 빗줄기는 굵고 단단했다.
“읏! 차가워라!”
습기가 짙은 무더운 날씨였다. 비는 차갑지 않고, 날씨는 춥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아닌 것 같았다.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바람에 비에 홀딱 젖은 남자는 로브를 쓴 소년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더는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어서 호텔로 돌아가요.”
“······.”
“확인하셨잖아요.”
언제 그가 여기에 왔는지 알 수 없다. 분명 몰래 나왔는데. 정신없이 일하는 것을 보고 왔는데 말이다.
밤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이지엘은 몰래 호텔에서 나온 로브를 쓴 소년을 끌고 가려고 했다.
“잠시만.”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난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로브에서 흘러나왔다. 이지엘의 손을 쳐낸 소년의 완강한 태도에 이지엘은 우선 소년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비가 그칠 줄을 몰랐고 소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갈 필요가 있었다. 이지엘의 가슴 부근에 오는 소년의 머리 위로 이지엘의 커다란 손이 닿았다.
“돌아가셔야 해요. 제가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녀가 달라졌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을 받던 소녀는 남루한 차림으로 다녔다. 하얀 피부를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온몸을 옷으로 가렸고, 몸에는 이상한 냄새가 날 정도로 씻지 않았다.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전하고 다르게, 혐오의 대상으로 말이다.
“좀 더 여기에 있을 거다.”
그녀와 가까이 닿은 손가락 사이에 열기가 감돌았다. 소년의 말에 이지엘은 한숨을 내쉬고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전하는 아직 어리십니다.”
“알고 있다.”
“만나서는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이지엘은 무슨 말을 하려다 한숨을 내쉬고 소년이 든 우산을 자신이 잡았다. 소년은 키가 작다. 우산을 자신이 들어야 편안하게 쓸 수 있었다.
“날씨가 맑아서 우산을 안 챙겨 왔는데, 전하의 말씀대로 챙겨 올 걸 그랬어요.”
“우기에는 비가 언제 올지 모르지. 그래서 우산을 반드시 챙겨야 해.”
“이번에 단단히 알았어요, 어쨌든 이제 가셔야 해요. 여기 놀러 온 것도 겨우 허락받았는데, 호위도 없이 무단으로 나가신 것을 폐하께서 아시면 다시는 이곳에 올 수 없을지 몰라요.”
이지엘은 조곤조곤 말했다.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으려는 소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이 말이 최고일 것이다.
“내일 어차피 만날 건데.”
이지엘의 말에 소년이 조금 반응을 했다. 다른 이들보다 감정 표현이 서툴렀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얼굴에 보이는 소년이기에 이지엘은 소년이 마음을 돌린 것을 알았다.
“가지.”
소년의 말에 이지엘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일에는 관심 없으면서 오로지 그녀와 관련된 일에는 관심이 많다.
“만나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남루하고 지저분한 채로 있지만, 소녀가 아름다운 것은 두 사람 다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만 꾸미면 그 외모는 금방 빛날 것이리라. 이지엘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소년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기쁘군.”
“예쁘지 않아 아쉽지 않습니까?”
소년을 놀리는 말투였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로브 안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지엘이 상상한 것과 달랐다.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이다.”
과일을 줍기 위해 머리카락을 치웠을 때 살짝 볼 수 있었던 호반을 닮은 눈동자, 시린 파란 눈동자가 눈가에 아른거렸다.
“아무튼, 첫사랑을 다시 보러 이곳까지 오는 황자님은 전하 말고 없을 겁니다.”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졌다. 우기에 쏟아지는 비는 국지성 소나기가 대부분이다. 비는 금방 멎었고 이지엘은 우산을 접었다.
멀리서 호텔이 보였다.
*
*
호텔의 입구에는 돌로 만든 조각상이 서 있었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하얀색 도로의 양 끝에는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호텔은 메인 건물이 있고 그 뒤로 작은 집들처럼 조그만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호텔의 큰 건물에는 주로 귀족들이 묶고 작은 건물에는 보통 평민이나 관광객들이 묶었다.
로브를 쓴 소년은 하얀색 큰 건물로 들어갔다. 호텔의 메인 건물이었다. 입구에 있던 갈색 피부의 남자가 소년이 들어오자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메인 건물에 들어오는 사람은 적어도 고위급 귀족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친절하게 잘 모셔야 했다.
로비에 같이 들어간 이지엘이 물건 보관실에 맡겨 둔 방 열쇠를 찾았다. 정교하게 만든 열쇠고리에는 호텔을 상징하는 바나나 모양의 작은 조각이 달려 있었다.
로비의 깨끗한 바닥 위에 우산에 맺혀 있던 빗물이 똑똑 떨어졌다. 소년은 다시 한 번 우산을 털러 밖으로 나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때였다.
“로브를 벗어 주십시오.”
호텔에서 경비를 서는 기사가 말했다. 간혹 호텔에 찾아오는 불청객을 막기 위해 신분 확인을 반드시 해야 했다.
기사의 말에 소년은 말없이 후드를 젖혔다.
‘세상에.’
기사는 감탄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소년에게 머물렀다. 찰랑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았다. 맑고 투명한 붉은 보석이 얼굴에 박혀 있었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하게 있는 높은 코와 입술, 사람인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이었기에 기사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던 왕비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기사는 홀릴 것 같은 외모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경계해야 할 상대에게 정신이 팔린 꼴이라니. 하지만 그만큼 소년의 외모는 치명적이었다.
어린데 이런 모습이라니, 나중에 크면 세상을 뒤흔들 것이리라.
“히세예야프 블로딘 헬란.”
소년은 자신의 풀네임을 말했다. 예상보다 큰 거물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호텔은 며칠 전부터 한 손님 때문에 떠들썩했다. 헬란 제국의 제1황자인 히세예야프 블로딘 헬란이 온다는 소식에 청소하고 방을 꾸미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그때 기사는 비번이어서 쉬고 있었지만 헬란 제국의 황자가 온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세운 소년이 그 소년일 줄이야. 기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럼.”
히세는 온몸을 떨고 있는 기사에게 시선을 거두고 계단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뒤에서 이 상황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던 이지엘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로브 쓴 손님은 우리 황자 전하 말고 없을 거예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네요.”
얼어붙은 기사에게 충고를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방 안에 들어온 히세는 로브를 완전히 벗었다. 이지엘은 로브를 받아 드레스 룸으로 가 옷걸이에 로브를 걸었다.
방은 넓었다. 두 명이 잘 수 있는 침대, 방과 바로 연결된 욕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침대 옆에는 고급스러운 갈색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에는 드레스 룸이 있었다. 메인 건물의 가장 최상층, 이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이었기에 벽에 그려진 문양은 화려하고 섬세했다.
그는 이 방을 보고 감탄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높은 곳에 있어 직접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기에 굉장히 번거로웠다. 그래서 처음 여기 왔을 때 아래층에 적당한 방을 알아서 예약하라고 했지만 그를 따르는 이지엘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했었다. 그리고 황자에게 어울리는 최고급 방을 잡았다.
이지엘은 히세의 시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맑은 검은 눈동자가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다. 깊은 어둠이 담긴 눈을 응시하던 히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이지엘하고 같이 쓰고 왔으니 옷이 비에 젖었다. 바지의 밑단에 물기가 머물렀다.
욕실 바닥은 회색이고 욕조는 하얀색이었다. 세면대에 옆에 놓인 쟁반에는 수건과 치약, 칫솔이 있었다. 동그랗게 말아 예쁘게 접은 수건을 펼친 히세는 젖은 부분을 먼저 닦고 옷을 벗었다. 고운 천으로 만든 옷을 곱게 접어 선반 위에 올려 둔 다음 맨몸으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에는 이미 뜨거운 물이 담겨 있었다. 그가 나간 사이 메이드가 알아서 준비한 것이었다.
욕조에는 두둥실 붉은색 꽃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히세의 붉은 눈동자가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정말로 만났다.”
만약 이지엘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분명 놀렸으리라.
만남의 여운이 감돌았다. 이것을 좀 더 음미하고 싶다. 즉,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곳에 왔다. 이지엘은 욕실까지 따라오지 않으니 말이다.
욕조에 몸을 기댄 채 손을 들어 위로 올렸다. 그녀의 과일을 잡은 손을 주먹을 쥐었다 다시 폈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멀리서 지켜보다가 과일이 자신 쪽으로 굴러 와서 준 것 말곤 없었다. 물론 그녀를 좀 더 가까이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한 걸음 내디딘 것도 있지만 말이다.
고맙다고 하는 음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나고 싶어 이곳까지 왔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해야 한다. 그녀조차 말이다.
물에서 한참을 생각하던 히세는 일어나 욕조 밖으로 나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몸은 성인의 단계를 밟아 가고 있었다. 벌어진 어깨와 자잘한 근육이 그가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수건을 꺼낸 그는 몸을 닦고 가운을 걸친 뒤 욕실 문을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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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어깨 높이 부근까지 자란 나무에 열매가 옴팡지게 익었다. 입에 넣으면 단맛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노란색 열매가 알알이 실했다. 과일 농장 주인은 입이 귀에 걸렸다.
에다는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고 비죽비죽 솟아난 잡초를 뽑았다. 나무 근처를 말끔하게 정리한 다음 가위로 열매의 꼭지 부분을 잘랐다. 동그란 열매가 툭 하고 그녀의 바구니에 떨어졌다.
로로실은 오이난국 전역에서 재배되는 과일이다. 껍질을 손으로 깔 수 있었고, 그 안의 하얀색 알맹이는 맛이 달곰하고 과즙은 시원했다. 씨앗조차 단맛이 났다. 오이난국의 평민들이 즐겨 먹는 서민 과일이었다. 과일 등급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에다가 일하는 농장에서 재배하는 로로실 과일은 최상급이었다.
무더운 우기, 찬물에 담가 두면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유난히 우기에 잘 팔리는 과일이기도 했다.
이 농장은 수확을 앞두고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에다처럼 지저분한 사람이라도 급히 채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재빠른 손놀림으로 로로실을 딴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농장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그녀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던 농장 주인인 클락의 입이 귀에 걸렸다.
“벌써 한 바구니 다 한 거야?”
어제도 이렇게 감탄했던 것 같은데.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손이 빠른 에다였기에 농장 주인은 매번 그녀의 속력에 놀라고 있었다.
“너는 특별히 큰 바구니를 줘야겠는걸.”
“그럼 무거워서 못 들어요.”
“그건 그래.”
아직 몸집이 작은 에다다. 어른들이 드는 무거운 바구니에 과일을 가득 채우며 낑낑거리다 못 들 것이 분명했다. 상상이 절로 되는 일이었기에 농장 주인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농장의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이유가 줄곧 궁금했었다.
에다의 질문에 클락은 기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헬란 제국의 귀족이 온다고 하지 뭐야.”
“헬란 제국요?”
“정확히 누구인지 몰라. 그쪽이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았거든. 아무튼, 귀한 손님이 이곳을 방문해 로로실을 사 가겠다고 했어. 엄청난 물량이라서 손님맞이 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지. 거래가 잘되면 다음에 거래할 수도 있잖아.”
“얼마나 사 가는데요?”
“오늘 수확해도 다 못 채울 양이야.”
“그만큼요?”
클락의 농장은 크다. 보통 농장에서 나오는 양의 세 배는 족히 넘는다. 로로실은 맛이 괜찮지만, 상온에 두면 금방 상하기 때문에 대용량으로 거래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클락이 신경 써서 준비하는 이유가 있었다. 에다는 헬란 귀족이라고 해서 살짝 긴장했으나 아직 아버지가 오기 전이라는 것을 깨닫고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지?’
대공비가 되었을 때 헬란의 고위 귀족은 대부분 만났다.
‘아는 사람일까?’
궁금증이 일었으나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헬란의 귀족이 혹시라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었기에 마주치지 않은 것이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과일 수확에만 집중했다.
*
*
로로실을 바라보던 히세는 손으로 과일 껍질을 깠다. 과일의 하얀 속살이 모습을 금방 드러냈다. 그는 손보다 작은 알맹이를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시원한 과즙이 입 안으로 퍼졌다. 이지엘도 그의 옆에서 로로실을 먹고 있었다.
히세는 텅 빈 그릇을 보고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조금씩 먹었는데 벌써 클락이 준 것을 다 먹었다. 인근 농장에서 가장 품질이 좋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손이 저절로 갔다.
클락은 그들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거래하겠다고 했지만, 돈을 받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다. 귀족이란 그 속성이 변덕스럽기 그지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거래는 제대로 할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농장 주인인 클락이 손을 비비며 그들에게 물었다. 헬란의 귀족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는 듯 더운 우기인데도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목소리라도 들었으면 하는데 그 옆에 있는 검은 머리카락 미남자가 귀족 대신 말을 했다. 덕분에 클락은 헬란 귀족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잘 드시고 계세요.”
“다행입니다.”
이지엘은 웃으면서 히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히세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클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제 수확한 것도 있나?”
두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다. 클락은 그제야 자신이 원하던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변성기에 막 접어든 소년의 목소리는 듣기 아주 좋았다.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같이 사지.”
오늘 완전 횡재했다. 기존에 있던 양도 엄청난데 여기서 더 산다고 한다.
“선금입니다.”
안 팔리면 파산이다. 오늘 거래를 위해 평소에 거래하던 상인과의 만남을 모두 다 취소했다. 상인들에게 오늘 분량의 로로실은 다 팔렸다고 해서 농장의 로로실의 가치는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만약 헬라 귀족이 사지 않으면 상품에 하자가 있어서 안 팔렸다는 소문이 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농장에 치명적인 타격이 온다.
클락은 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여기.”
헬란의 귀족은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요란한 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만, 귀족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부를 하며 그들의 환심을 사던 클락은 이번 거래가 조금 답답했다.
히세가 갈색 주머니를 클락에게 주었다. 금화가 들었다고 하기엔 주머니의 부피가 너무 작았다. 클락은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얼른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 이건!”
안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사파이어가 들어 있었다. 보석의 크기는 매우 컸다. 부르는 게 값일 것이다. 거기에 이 정도 크기라면 팔리기도 잘 팔린다. 귀족 가문에서 서로 사 가려고 할 것이다.
“부족한가?”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인 건가? 클락은 이 거래가 믿기지 않아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픈 것을 보니 진짜 현실인 모양이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어제 과일들은 과일을 수확하는 인부에게 모두 다 나눠 줘라.”
이 농장의 로로실은 하루의 일당 값어치를 대신할 정도로 비싸다. 그런데 헬란 귀족이 그것을 나누어 주려고 한다. 클락은 헬란 귀족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신은 돈만 벌면 되니 상관없었다. 거래가 취소만 안 되면 된다.
“농장을 구경하고 싶군.”
로로실 과일에 애착이 생긴 게 분명하다. 클락은 자신이 안내하려고 했다.
“주인님께서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지엘은 클락이 나서는 것을 말렸다.
“우리가 알아서 조용히 구경할 테니 물량을 준비해서 호텔에 가져다 놓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지. 거기에 로로실을 운반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클락은 방을 나갔고 이지엘과 히세, 단둘이 남았다. 이지엘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히세를 응시했다. 이지엘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사파이어라면 여기 로로실 1년 치 수확한 것보다 값어치가 있어요.”
“알고 있다.”
“돈을 들고 오기 귀찮아서 그걸 들고 오신 것 맞죠?”
히세는 말이 없이 클락이 추가로 놓고 간 과일을 야금야금 먹었다. 그 태도에 이지엘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화를 다스렸다.
히세는 무표정하고 항상 얼굴이 굳어 있다. 잘 웃지도 않아 밀랍 인형 같다. 그런 이미지 덕분에 히세가 단것과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한편 옆에서 날뛰는 이지엘을 무시한 히세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이난국에 와서 그녀를 만나고, 겸사겸사 좋아하는 과일도 샀다. 히세는 이번 여행이 만족스러웠다.
“이걸로 그녀도 오늘은 저녁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알고 있다.”
그녀에게 좋은 일도 했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첫사랑이라니.”
“어리지 않아.”
이지엘은 그 말에 나직이 웃었다.
“전하가 올해 열여섯이시죠?”
“응.”
“그녀를 만난 것이 열여섯이었나요?”
이지엘의 질문에 히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경하러 가겠다.”
“숨기기만 한다니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게 그리 아까우세요? 히세예야프 전하.”
“······.”
말하지 않은 걸 봐서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표정 변화가 없어 다들 히세를 어려워하지만 이지엘은 그가 누구보다 솔직한 것을 알기에 이렇게 소년을 종종 놀렸다.
농장은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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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이 농장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 안에 로로실 나무가 심어져 있고 다들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과일을 수확하고 있었다. 인부들은 더운 날 로브를 쓰고 나타난 소년과 그 소년 옆에 있는 검은 머리 미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헬란 제국의 귀족이 온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클락이 인부들에게 소문을 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소년은 농장을 보고 감탄했다. 클락의 나무는 튼튼하다. 병충도 없고 잡초
(2권에서 남긴 리뷰)